2022/11/23 하나님의 용서와 이끄심이 삶의 동력이 되게 하라 (창 50: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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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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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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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15-26은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 이후 자신들과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겸손함을 잃지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요셉이 되갚음할 것에 대해 염려한 까닭입니다.
요셉은 '용서'란 말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이 내 안을 감싸면 십자가가 주는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제들의 마음을 제거한 것입니다.
대신 요셉은 형제의 시선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끕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절)
이것은 20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하나님이 이미 판단을 내리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해하려 하다'와 '선으로 바꾸다'에는 같은 동사(히, 하샤브')가 사용됩니다.
동사의 의미는 '꾀하다'와 '계획하다'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꾀하'였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할 계획'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는 '생명보존'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생명구원'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이 생명을 보존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야 되는 새로운 인류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요셉이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위로하며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앞에서 사는 요셉이었기에 홀로 감당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선하심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은 것입니다.
'내 뼈를 이곳에서 갖고 나가'(25절) 달라는 유언은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바라보며 판단의 자리가 아닌 예배자의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겸손함을 잃지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요셉이 되갚음할 것에 대해 염려한 까닭입니다.
요셉은 '용서'란 말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이 내 안을 감싸면 십자가가 주는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제들의 마음을 제거한 것입니다.
대신 요셉은 형제의 시선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이끕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절)
이것은 20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하나님이 이미 판단을 내리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해하려 하다'와 '선으로 바꾸다'에는 같은 동사(히, 하샤브')가 사용됩니다.
동사의 의미는 '꾀하다'와 '계획하다'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꾀하'였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할 계획'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는 '생명보존'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생명구원'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이 생명을 보존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야 되는 새로운 인류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요셉이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위로하며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앞에서 사는 요셉이었기에 홀로 감당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선하심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은 것입니다.
'내 뼈를 이곳에서 갖고 나가'(25절) 달라는 유언은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바라보며 판단의 자리가 아닌 예배자의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